역사와 기억, 제3언어
    일민미술관에서 진행되었던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상'에 대한 다큐멘터리 쇼, 'Diary'전]을 보고 왔었다. 여러작품들이 상영되었지만,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손광주 감독님의 단편 "요요기 공원"이었다. 그래서 전시를 보러 갔던 날도 일단 손광주 감독님의 단편영화들이 상영되는 모니터 쪽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관객이 아무도 없었고, 나는 쇼파에 길게 누워서, 매우 편한 상태에서 영화를 보...려 했으나 난데없이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내 얼굴을 계속 더듬는 바람에 마냥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촉감이 왠지 무당벌레같다고 느꼈었는데, 핸드폰 불빛으로 확인해보니 역시 녀석은 무당벌레였다. 나는 그 무당벌레에 의미를 부여해야 했다. 시를 써야하는 순간. '우리 얼마만에 만난거지?'
    손광주 감독님의 세 편의 단편. <제3언어>,<단속평형>,<요요기 공원>. <단속평형>은 아마도 SENEF에서 봤던 것 같고, <제3언어>는 예전에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의 MIA에서 상영회를 했을 때 가서 봤었다. 그 날이 2005년, 내 생일이었기 때문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데... 뒷풀이 자리에서 손광주 감독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감독님이 내게 조용히 용기를 북돋아 주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만해도 공대생이었던 나에게, 공대 계열의 공부를 하시고 전공과 관련된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돌연 영화 공부를 시작하셨던 감독님의 이력은 그 프로파일만으로도 하나의 희망이었다. (심리학으로 전과를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효한 '감히' 롤모델)
    이번에 상영된 손광주 감독의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역사'와 '기억'에 대한 영화였다. 세 편을 이어서 감상하니, 예전에 따로 한 편 씩 보았을 때는 발견하기 힘들었던 일관된 주제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 청바지, 머리 속의 온갖 '서양 문화'에 대한 지식들, 내가 앉아있는 '쇼파' 그리고 미술관이라는 '공간'...... 영화를 보고 나니 모든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처음 <단속평형>을 봤을 때는 그저 재미있는, 잘 만들어진 단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감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도대체가, 정말로, 머리는 21세기 속으로 디밀었지만 꼬리는 여전히 19세기에 걸쳐있는 거대한 공룡같은 이 사회가 그 꼬리를 끊어내고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려면, 몰상식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기억'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할진데,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하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답답하다. 

   이제 '기억'이 난다. 일민미술관에서 손광주 감독님의 영화를 보았던 것은 4월 10일. 영화를 보고, Lloopp 워크샵 마지막날 행사였던 "Relay" 즉흥연주공연을 보기 위해서 아트센터 나비로 갔었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보게 된 '탈역사'적인 공연. 노이드의 첼로 연주는 계통이 없는 연주. 첼로는 단지 소리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도구일 뿐, 첼로에 새겨져 있던 역사적 기억, 첼리스트의 몸에 새겨져 있던 전통적인 연주에 대한 기억은 다 휘발되어 버렸다. 파가신스키가 '이용'하는 클라리넷에서는 멜로디가 아니라 공기의 파편이 흩어져 나온다. 우리에게 익숙한 음계, 멜로디. 그것들은 모두 학습의 결과로 친근해진 것들, 즉 일종의 기억. 그런데 애초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와 맞닥뜨리는 순간. 역시 낯설다. (적어도 나는 최초의 순간으로 돌아가보고자 했다. 0에 대한 기억. 아니 정확히 말하면 0에 수렴하는 어느 순간에 대한 기억.) 
 
   나도 "모든 형태의 식민주의에 반대한다." "언어가 지니는 억압과 폭력에 대해 저항"하며 "타자의 언어와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전혀 엉뚱한 제3언어를 만들어 냄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역사를 대안의 미래로 개조해 나가길 희망한다'던 손광주 감독의 멘트. Relay 즉흥연주 공연을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 제3언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경계없는 즐거운 사유의 결정체를 단단하게 다져나가야할 순간이 다가온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 손광주 감독님의 새 단편영화, <파편의 경치>가 상영된다는데... GV도 하신다고. 여러모로 이번에 전주에 못 가는게 아쉽다. ㅠㅠ)

oh, my lady-bug...

by keziac | 2008/05/02 22:54 | psych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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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은지 at 2008/05/12 22:27
난 전주 갔다왔는데~
Commented by keziac at 2008/05/12 22:36
췟...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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